올해 88세이신 저희 할아버지는 건강하신 편이셨습니다. 당뇨도 없고, 혈압도 안정적이었고,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같은 동네를 산책하시던 분이었습니다. 그런데 어느 날, 새벽에 나가신 뒤 3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. 핸드폰도 두고 나가셔서 결국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됐고, 서울시 전역에 실종경보 문자가 발송되었습니다. 다행히 시민 한 분의 제보 덕분에 점심 무렵 무사히 돌아오셨지만, 그 하루는 저희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.
그 사건 이후 병원에서 받은 인지기능 검사 결과를 다시 들여다보니, 1년 전 26점으로 정상이었던 점수가 16점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.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.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.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. 아직 치매는 아니고, 그렇다고 치료제가 건강보험으로 적용되는 단계도 아닙니다. 효과가 입증된 약이 있다지만, 연간 수천만 원의 약값을 개인이 부담하기엔 너무나 현실이 가혹합니다. 결국 저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할아버지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는 것뿐이었습니다.
치매는 어느 가족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이며,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질병입니다. 특히 경도인지장애는 치매로 가는 초입 단계로, 이 시기에 개입하면 중증으로의 진행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다수 존재합니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치매 정책은 여전히 중증 이후의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, 예방과 조기진단·조기치료에 대한 지원 체계는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.
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. 혈액검사 등 비용 효율적인 진단 기술을 활용해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굴하고, 경도인지장애 및 초기 치매 환자에게 효과가 입증된 치료제를 조속히 건강보험 급여화해 주시기 바랍니다. 현재 일부 치료제는 해외에서 허가를 받고 국내에서도 사용 가능하지만,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사실상 선택할 수 없습니다. 급여 시범사업이라도 시작해, 환자와 가족에게 현실적인 희망을 제공해야 합니다.
또한, 치매 정책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합니다. 단순히 환자를 관리하는 체계에서 벗어나, 환자와 가족이 신뢰할 수 있는 지역 기반의 통합돌봄 체계가 필요합니다. 국가와 지자체의 돌봄 책임을 명확히 하고,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시기 바랍니다. 실질적인 지역돌봄이 작동해야, 치매가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관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.
치매는 모두의 문제입니다. 오늘은 저희 가족의 이야기지만, 내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. ‘치매를 관리하는 정책’에서 ‘치매의 시간을 줄이는 정책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. 예방과 조기개입, 그리고 공공 책임에 기반한 돌봄 체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. 이 제안이, 보다 인간다운 노년과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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